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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u

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5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역시 잘못 온 것일까?’ 브리즈번 시내의 번화가를 걸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지나가며 흘리는 수많은 대화들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빛의 속도로 빨려 들어와 뇌를 때리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은데도 너무나 소상히 들려오는 그 왁자지껄한 소리들. 긴 시간을 타 언어권 사람들과 보내고 나면 신경 써서 듣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귀가 평소보다 열려 있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갑자기 다시 모국어를 듣자면 쓸데 없는 나방 같은 정보들까지 다 채집되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또 한 달 정도는 이런 현상에 시달릴 것인데……. 어쨌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 더보기
두 번째 눈 없는 겨울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4두 번째 눈 없는 겨울 따사로운 가을 볕을 매일 같이 뽑아내던 태양이 더 이상은 재료가 없는지 뒤로 뒤로 물러만 간다. 교정 가득 수북이 내려앉은 노란 낙엽들만큼이나 열 여섯 명의 작업들도 각자의 서랍이 터져나갈 정도로 쌓였다. 학우들의 견제 아닌 견제 속에, 가능했던 모든 것들을 토해내며 살 떨리는 최종 평가를 해치운 나에게 춥고 황량한 캔버라의 7월을 선물하는 것은 자학에 가까운 행위였다. 고심 끝에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을 곳을 가기로 했다. 바로 브리즈번. 해외에 거주할 때만큼은 한국인 밀집지역을 기피하는 나이지만, 멜번과 캔버라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감에 선택한 항로였다. 한 학기 동안 종종 담소를 나누곤 했던 도예 전공 교환학생 에이미.. 더보기
Printmaking & Drawing Workshop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3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Printmaking & Drawing Workshop 이 곳에서의 한 학기는, 대외적 명분상으로는 내가 이전에 배워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시간이었지만 아니, 그것보다는 내 자아를 고요 속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라졌다 돌아와 ‘간밤에 내 닭이 무슨 알을 낳았나’ 하고 지푸라기를 헤집어보는 어린 주인이 되는 어떤 놀이의 반복이었다. 전공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빡빡한 학교생활에 비하면 수업도 과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나를 쫓던 대부분의 요소들이 순간 사라진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큰 검은 작업용 책상과 큰 종이를 넣기에 넉넉.. 더보기
캔버라. 새와 밤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2캔버라, 새와 밤 1 아무것도 없다. 해야 할 일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작업과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도시. 아무 향도, 어떤 맛도 첨가되어있지 않은 정제된 수돗물과 같은 도시 캔버라. 걸어도 걸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풍경 속, 아주 멋없고, 우울하도록 솔직한 인공 호수가 있다. 여기서 만난 것은 사람도 건물도 아닌, 새들이다. 나는 이 호숫가에 앉아 정체 모를 검은 새의 일광욕을 넌지시 바라보다, 청둥오리들의 행렬에 길을 비켜주고, 동그란 열매를 부리로 아그작거리는 분홍가슴 새들이 놀라지 않도록 애써 플라타너스에서 시선을 돌린다. 짙으면서도 붉은 호주의 녹음이 황금으로 다시 피어나기까지, 노란 왕관을 쓴 새하얀 앵무새 코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