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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Printmaking & Drawing Workshop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3

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Printmaking & Drawing Workshop


이 곳에서의 한 학기는, 대외적 명분상으로는 내가 이전에 배워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시간이었지만 아니, 그것보다는 내 자아를 고요 속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라졌다 돌아와 ‘간밤에 내 닭이 무슨 알을 낳았나’ 하고 지푸라기를 헤집어보는 어린 주인이 되는 어떤 놀이의 반복이었다. 전공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빡빡한 학교생활에 비하면 수업도 과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나를 쫓던 대부분의 요소들이 순간 사라진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큰 검은 작업용 책상과 큰 종이를 넣기에 넉넉한 서랍, 소란스럽지 않으며 협조적인 열 다섯 명의 수업 동기들이다. 언뜻 보면 거렁뱅이 같아 보이기도 하는, 긴 머리에 깡마른 체구를 한 4차원 베이야드, 수다쟁이의 그것과 비슷한 목소리 톤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친절한 냇(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학기를 마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작업 욕심이 대단한 쾌활한 호주 아줌마 가비, 만삭의 몸을 이끌고 학구열을 불태우는 젊은 금발 엄마 케이티와 산전수전 다 겪었을 것 같은 투박한 인상에 그와 똑 닮은 작업을 하는 아저씨 케빈, 황혼기를 배움으로 보내고 있는 체력 좋은 할머니 베티, 그리고 그네들의 카리스마 혹은 자아도취 때문에 제대로 통성명 해보지 않은 몇몇 친구들까지. 각각의 극명한 개성으로 이미 철옹성을 쌓아 올린 예비 작가들인지라 누가 더 가깝고 누가 더 멀고 할 것이 없다. 모두 개인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다가 아주 드물게 서로 맞물리는 접점이 생길 때 가벼운 수다를 함께하는 정도가 전부다. 교환 학생과 함께 수업을 하는 것이 처음인 메인 교수 사샤와 그녀의 학생들은 나를 대할 때마다 당황하는 눈치였다. 교환 학생에게 학교 차원으로 제공되는 재료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별도의 수업을 할 경우 행정 상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지 등의 사항을 아무도 알지 못해서 수업 시간 중에 내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으레 이런 식이다.


“교환 학생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부수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과정 중 당황한 적도 많았지만 공인된 예외의 시간을 늘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호주에서 행정에 관련된 무언가가 완벽하게 이루어 진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교통편이 촘촘히 배치되지 않은 도시인지라 차를 가진 친구와 사전에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미술관 현장 수업 정도는 그대로, 가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다. 빠지면 빠지는 대로 마음껏 개인 작업을 하면 그만이었다. 가도 좋지만 가지 않으면 더 좋은 상황. 그래도 국립 미술관의 비공개 자료들을 큐레이터의 감독 아래 마음대로 들춰보고 만져볼 수 있다는 건 학생으로서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기회인지라 갈 수 있는 만큼은 꼭 챙겨 갔다. 그 외엔 웬만하면 남겨진 시간의 대부분을 학교 작업실에서 보내곤 했다. 넓고 검은 책상 위에,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다 담기지 못해 흘러내리는 광경.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캔버라의 풍경이다. 학교라는 공간에 이토록 기대어 있으면서도 내가‘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외부적으로 다가오는 압박, 혹은 자극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 없이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혹시 있을지 모를 물줄기를 찾아 헤맸다.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은 작업. 그러나 이를 외면할 시에 닥쳐올 것은, 내 힘으론 견딜 방도가 없는 그런 유의 권태였다. 땅이 넓은 탓인지 이 도시엔 유난히 의미 없이 방치된 공터가 많았는데, 그곳들을 가로지를 때마다 나는 마치 나의 위치와 심리상태를 가시화한 그래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함보다는 담담함으로 보낸 시간들. 한국에서였다면 가능했을까? 포부로 가득했던 대학 생활의 마침표를, 마침내는 텅 빈 곳에 찍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