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썸네일형 리스트형 반짝이는 베니스의 청록 런더너의 막간 이태리 여행 │ 반짝이는 베니스의 청록 아름답게 낡아간다. 새로워질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베니스의 크고 작은 섬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삶의 자세였다. 베니스를 둘러싼 거대한 청록의 물결은 이 낡은 도시를 1초도 쉬지 않고 넘보고 있었다. 청록은 도시의 외벽에 스며들어 하나씩 둘씩, 소금기에 해진 칠과 무른 흙을 거두어 간다. 그럼에도 앙상한 벽돌을 훤히 드러낸 건물들은 현재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네들이 그렇게 존재하듯 누구에게도 새로워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쓰러지지 않도록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기초를 이따금씩 보강할 뿐이다. 로마와 피렌체도 멋진 도시였지만, 이번 여행 중 마음의 고삐가 탁 풀리는 편안함을 느낀 곳은 베니스가 처음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 더보기 색채의 곳간 피렌체 런더너의 막간 이태리 여행 │ 색채의 곳간 피렌체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긴 사흘이라는 시간을 할애한 도시는 피렌체였다. 온갖 후기를 섭렵한 결과, 베니스보다는 피렌체가 볼거리가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 마음에 드는 곳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가도,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도 개의치 않는 여행 동지들과 함께여서 가능한 일정이었을 것이다. 각각 문학과 패션을 전공한 친구들과 서로의 관심사와 소회를 나누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었다. 혼자서라면 가볼 생각조차 못했을 페라가모 본점이라든가, 진정한 육식 마니아들만이 접시를 비울 수 있는 특대형 스테이크 전문점 같은 곳들을 방문하며,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취향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단조로운 톤이 주를 이루는.. 더보기 로마 카타콤의 닻 런더너의 막간 이태리 여행 │ 로마 카타콤의 닻 41도의 뙤약볕 아래, 수많은 인파들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였다. 교황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다. 그늘 하나 없는 광활한 광장에서 저마다 타는 목마름으로 우산이나 지도에 매달려 교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30분가량 기다리자니 정수리와 어깨가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흘깃, 돌리자 같은 말을 담은 친구의 눈이 마주쳤다. 한 번쯤 교황의 모습을 보고는 싶었지만 봐야 할 수많은 곳들이 남아있기에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서늘한 판테온(Pantheon)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제야 더위에 나간 넋이 돌아오는 듯했다. 판테온은 로마에 현존하는 돔 구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재건된 시점으로만 따져도 서.. 더보기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10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졸업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2011년 여름 날아든 반가운 소식은 나의 다음 행선지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의 지역 예술재단 메클렌부르크 인스피리엇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 작가로 선정된 것이다. 회화 작가로는 내가 유일했기에 더욱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치, 영상, 사진, 공예, 춤, 음악 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지원한 공모였다. 레지던시 공모 결과. 가장 상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어찌나 두근대던지. 가을에 접어들면 또다시 어둑한 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할 런던을 벗어난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지만 주변 영국인 친구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독일 북부라고?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 더보기 로빈과 이안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9로빈과 이안 석사과정의 커리큘럼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제나 소재를 던져주면 ‘알아서’ 결과물을 만들어 오는 것이다. 진행 과정에서 두 세 명의 교수 혹은 강사들에게 꾸준히 조언을 듣는다. 조언이 필요한 만큼의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발표를 할 때마다 메인 교수 로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잠깐, 그건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데?’ 였다. 처음 입학허가를 받던 시점부터 우려했던 부분들이 슬슬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작업의 흐름은 그 형태적으로는 점점 더 추상에 가까워져 갔고, 불행히도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단어는 ‘예시를 들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재구성하고 표현하려는 대상 자체.. 더보기 런던에도 봄은 오더라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8런던에도 봄은 오더라 오후의 나른함이 드리운 방 안의 공기가 거짓말 같다. 결국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오로라 주의보에 의하면, 그날은 연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오로라의 세기가 강한 날이었다. 핀란드 국경까지 달렸지만 두터운 눈구름은 손바닥만치도 걷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아쉽지가 않은 것은, 우리가 제대로, 다시, 어느 좋은 날에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마주쳤다면, 내가 소원해온 시간들이 더욱 아쉬웠을 지 모를 일이다. 언제이고, 그 겨울로 나는 돌아갈 것이다. 삭막한 도시와 고요한 항구를 지나 2주 만에 돌아온 방에는 봄이 가득 들어차 있다. 정원의 풀꽃들이 문틈으로까지 얼굴을 내밀고, 창 밖엔 팝송에나 가끔 등장하던 블랙버드가 까르르 기웃.. 더보기 노르웨이에서의 3일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7노르웨이에서의 3일 처음부터 계획한 여행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행 저가항공권을 구입하던 중 마우스 휠을 잘못 굴리는 바람에 돌아오는 도시를 오슬로로 잘못 선택했던 것이다. 유럽 저가항공사들은 항공권에 찍힌 이름 한 자 고치는 데도 항공권 값의 두 배 이상을 청구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엔 그냥 다른 항공권을 사는 게 노선을 바꾸는 것보다 더 저렴하다. 어차피 산 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런던에서 알게 된 연수생 D가 본인도 북유럽 투어를 계획한다기에 며칠 동참하기로 했다.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넘어가는 저녁에 합류하여 최북단 트롬쇠까지 갔다가 D가 스웨덴으로 건너갈 때 헤어지는 일정이었다. D가 노르웨이에 할당한 기간은 겨우 4일이지만 그 중 무려 이틀을 오로라관.. 더보기 새 집과 프랑크푸르트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6새 집과 프랑크푸르트 피신해 있는 동안 다행히도 근처에 빈방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인도계 영국인 가족이 살던 집인데 이사를 가면서 세를 놓는 중이라고. 집세가 조금 높긴 했지만 급하게 들어갈 방을 찾은 것도 감지덕지였다. 빈 방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 보이는 다용도실이었고, 집주인이 직접 만든 바가 한쪽 벽에 비치되어 있었다. 파티용으로 쓰던 공간인데 집주인 아들이 꼭대기 층에 계속 살 예정이라 술병들은 그대로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생활패턴이 비슷한 한국인 플랏메이트를 구해 함께 지내기로 했다. 건축학도인 H는 말이 잘 통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네일 아트 기술로 런던 땅에서 남부럽지 않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멋진 친구였다. 술병이 가득한 찬장은.. 더보기 공포의 베드버그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5공포의 베드버그 일주일 뒤였다. 급히 찾아낸 시원찮은 행복이 처절하게 부서진 것은. 온몸이 미치도록 가렵고, 아프고, 열이 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이 100개를 웃돌았다. 허름한 호스텔에 잘못 묵으면 베드버그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는 충고의 말을 전에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지내야 할 내 방에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은 상상치 못했다. 집주인은 베드버그의 근원지를 모르니 집세를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침대 매트를 들어내고 그 주변을 이 잡듯 뒤졌다. 점만한 베드버그들이 매트를 지탱하던 나무틀 안쪽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기에 의아했지만 3번에서 5번 이상 연속적으로 물린 자국들로 보.. 더보기 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5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매일 매일 닥쳐오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쳐낸다. 그런데, 그 뒤에 남겨진 응어리들을 마저 비워내는 작업은 으레 내 공간 안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에 주로 하던 일이다. 아, 그러나 지금 그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소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집세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을 셰어하는 형태로 집을 구했던 터라 모든 것에 룸메이트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책상 위 스탠드를 켜놓는 것 조차도. 생활 패턴이 정 반대인 동유럽계 회계 전공 학생을 만난 것도 불운 아닌 불운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지만 잔병치레가 잦아 은근히 신경을 써야 했다. 완전히 무장해제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없기에 별도의 작업 공간이 절실했지만, 학교에서.. 더보기 발목 잡는 오렌지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3발목 잡는 오렌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분명히 납입일에 맞추어 정확한 금액을 통장에 넣어 두었는데, 갑자기 학교측에서 학비 분납이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날아온 것이다. 언제까지 학비 전체를 납입하라는 통보와 함께. 첫 번째 납입액이 부족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황급히 거래 은행을 찾아 이체내역을 확인한 결과, 범인은 오렌지로 밝혀졌다. 요금제가 비교적 저렴한 프랑스계 통신회사여서 싼 맛에 계약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소리를 조금만 일찍 들었더라면……. 오렌지에서 정상적인 요금의 여덟 배를 인출해가는 바람에 학비로 나갔어야 할 금액에서 200파운드 정도 공백이 생겼던 것이다. 열 번쯤 항의 전화를 한 뒤에야 어눌한 말투의 인도계 .. 더보기 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2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얄궂은 이곳 한기는 가슴 속 온도계를 단번에 부러뜨리고도 시치미를 떼기 일쑤다. 영상 7도 따위에 뼈가 시린 느낌을 받는다는 건 꽤나 굴욕적이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단열이 잘 되지 않는 구조의 건물들 천지라 어느 한 곳도 마음 편히 추위를 털어낼 자리가 없는 것이다.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환영하던 나인데, 오후 4시부터 아득하게 깜깜해지는 이 스산한 겨울은 심히 당황스럽다. 이 영리한 도시는 무섭도록 어둠이 스미는 이 긴긴 겨울 터널을 무엇으로 심심치 않게 넘길 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크리스마스가 늦가을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청으로 암전되어가는 하늘 위로 금테를 두른 오색 행성들이 떠올랐고, 푸른 눈송이들은 그물이 되어 칠흑을 꽁꽁.. 더보기 런던에 속았다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1런던에 속았다 공항에서부터 내리쬐던 찬란한 가을 볕 탓에, 런던은 본디 이리 따사로운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을은 다급히 그 조명을 거두고 겨울로 이어지는 어둑한 구름 천막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빛 꺼풀이 벗겨진 이 오랜 도시가 굳은 표정으로 그 본연의 검붉은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섬뜩함마저 느꼈지만, 내 안에 술렁이는 그 기류 위에 ‘상실감’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래선 안 된다고. 학교도, (누구나 떠올리는 런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시내도 모두 내 생각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 흩뿌려야 하는 것이다. 지하.. 더보기 '09-'10 서울. 순도 100의 무모함 서울 #5. 순도 100의 무모함 유학 무한정 연기 실은, 돌아오자 마자 바로 9월 학기로 떠날 수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교환학생 선발이 결정되기도 전에 먼저 확정된 것이 영국 킹스턴 대학 석사과정 입학 허가였다. 설명이나 듣자며 참석했던 대학 설명회에서 관계자와 인터뷰를 가지던 중 무조건부 합격을 받았던 것이다. 멜번에서 어떻게 버스킹을 시작했었는지, 그림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는지 등의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떠들어댔던 것 같다. 조건부 합격을 받아둔 다음 영어 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많은데, 내 경우엔 교환학생 때문에 미리 받은 IELTS 성적이 있어 바로 결정이 되었다. 설명회에 참석한 이유는 사실 별 볼 일 없다. 같은 수업을 들었던 영국인 교환학생이 만날 때 마다 .. 더보기 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5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역시 잘못 온 것일까?’ 브리즈번 시내의 번화가를 걸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지나가며 흘리는 수많은 대화들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빛의 속도로 빨려 들어와 뇌를 때리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은데도 너무나 소상히 들려오는 그 왁자지껄한 소리들. 긴 시간을 타 언어권 사람들과 보내고 나면 신경 써서 듣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귀가 평소보다 열려 있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갑자기 다시 모국어를 듣자면 쓸데 없는 나방 같은 정보들까지 다 채집되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또 한 달 정도는 이런 현상에 시달릴 것인데……. 어쨌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