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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09-'10 서울. 순도 100의 무모함

서울 #5. 순도 100의 무모함

유학 무한정 연기


실은, 돌아오자 마자 바로 9월 학기로 떠날 수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교환학생 선발이 결정되기도 전에 먼저 확정된 것이 영국 킹스턴 대학 석사과정 입학 허가였다. 설명이나 듣자며 참석했던 대학 설명회에서 관계자와 인터뷰를 가지던 중 무조건부 합격을 받았던 것이다. 멜번에서 어떻게 버스킹을 시작했었는지, 그림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는지 등의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떠들어댔던 것 같다. 조건부 합격을 받아둔 다음 영어 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많은데, 내 경우엔 교환학생 때문에 미리 받은 IELTS 성적이 있어 바로 결정이 되었다. 설명회에 참석한 이유는 사실 별 볼 일 없다. 같은 수업을 들었던 영국인 교환학생이 만날 때 마다 본인의 학교를 자랑하기에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궁금해서였다. 주도 면밀한 성격이 못 되는데다 설명만 듣고는 딱히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내 눈엔 그 학교가 그 학교 같았다. 킹스턴은 나의 모교와 자매 대학이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션 수업 때 종종 출현했던 작품 자료들의 출처이기도 한데다 주변의 좋은 평이 더해지니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갈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밟을 유럽 땅이라면 학생 신분으로 진득하게 있어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학생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활동반경을 옮기고 싶은 것이다. 지형을 바꿔 놓으면 물은 알아서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섭취하는 음식이 바뀌면 피부와 체형에 변화가 오듯, 내가 온 몸으로 호흡할 타국의 공기, 바람, , 버스 밖 풍경, 대화 등이 오랜 기간 동안 내 안에 가랑비처럼 스미면, 마침내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조합의 색들이 캔버스 위에 피어날 것이다.

입학 허가를 받던 당시로부터 이미 벌어진 작업 성향이 다소 고민되기는 했지만, 아무쪼록 감당할 수 있겠거니 하며 다른 전공을 알아보지 않았다. 선뜻 회화 전공으로 넘어가기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내 작업이 어떻게 흘러갈 지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해서였다. 이것이 엄청나게 긴 타원 궤도 위에 있는 건지언젠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지아니면 궤도 따윈 애당초 없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한 차례 먼 바람을 쐰 마음 속 풍향계도 쉼이 필요했기에 나는 킹스턴 측으로 1년을 미루겠노라는 서신을 보냈다. 1년이라 했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무한정 연기나 다름 없었다. 나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언젠가부터 나의 지인들은 나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 혹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 둘씩 이번엔 얼마나 머물다 떠나느냐고, 혹은 아직 외국에 있느냐고 안부를 물어왔다.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아서, ‘곧 가게 되겠지’란 대답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남들이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게, 나는 흘러가는 상황에도 곧 잘 순응하는 사람이라서. 갈 때가 맞는 거라면 가게 되겠고, 갈 때가 아닌 거라면 갈 수 없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기도 하니까.      


 

아침, 커피를 뽑던 날들

 

문제가 생겼다. ANU 측에서 성적 처리를 너무 늦게 해주는 바람에 8월 졸업이 무산된 것이다. 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지만, 졸업식을 다음 2월에 해야 한다는 것이 학생처의 대답이었다. 갑작스레 생겨버린 너무 긴 과도기. 가만히 손을 놓고 있기는 가족들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미안해서 크고 작은 회사들에 지원해보며 할 만한 일들을 찾아 다녔다. 작은 까페 일을 고정으로, 공공 미술 작품들의 상태를 체크하는 일, 아트페어 스탭, 영어 과외 및 외국인 학교 방과후 교사와 같은 교육일 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에 손을 댔지만 그러는 동안 어느 회사에서도 연락을 주지는 않았다. 하긴 인사 담당자가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숱한 지원서들 중 나같이 역마살 붙은 사람을 못 골라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번듯한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모습이었지만 돈 대신 시간을 번 덕분에 동생과 큰 전시에 참여하기도 하고, 개인전을 할 만한 작업 분량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불러 주는 곳은 없었지만 이제까지 모은 것들을 한번쯤은 풀어 내야 할 시점이 다가 오고 있었다. 마침 일하던 카페 사장님이 가게 자리를 내놓게 되어 자연스럽게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왔다.

아침이면 눈, , 혹은 햇살을 맞으며 닫힌 문을 열고, 아침 라디오를 틀고, 주스가 될 과일들을 씻고 다듬고, 샌드위치 개수를 확인하고, 오픈 준비가 끝나면 커피 한 잔을 내려 놓고 출근 시간 손님들이 몰려올 때까지 멍하니 있다가 퍼뜩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퀴즈의 답을 문자로 보내기도 하던 날들.

참으로 익숙하고 담담한, 마지막이다.   



포기와 무모함의 접점에서


봄엔, 무작정 저벅저벅 걷는다

6개월만에 밟은 학교에서 1년도 넘게 못 본 학우들 사이 어디에 껴야 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 메모리 카드도 없는 빈 카메라 덕에 멀쩡한 사진 하나 못 건진 멍청한 졸업식을 치르고 난 첫 봄이다. 전시를 다니다 맘에 드는 공간이 보일 때마다 관계자에게 대관료를 물었다. 지하임에도 감당하기 어렵게 책정된 곳이 대부분이었고, 빛이 좋은 공간들은 가히 대학 등록금 수준의 액수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입구가 협소한 한 갤러리를 발견했는데, 학생 단체전을 하는 모양이었다. 비좁은 사무실을 두드리니 실장이라는 분이 나왔고 젊은 작가들을 위해서 저렴하게 대관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곳은 다시 없을 것 같아서, 덥석 예약을 했다. 전시가 끝나기 전까지만 완납하면 되니 그 정도면 아르바이트로도 충분히 메울 수 있다. 웃긴 것은, 여전히 영국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거의 반사적으로 8월 일정을 잡았다는 것이다. 1달 정도면 전시 후 잘 정리하고 떠날 수 있겠다, 하고. 이때까지도 나는 두 마음이 있었다. 안정적인 일을 구해 몇 년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과, 되든 안되든 무모하게 떠나보고 싶은 마음. 둘 중 하나를 포기하거나, 어느 한쪽에 미친 듯이 무모해지면 된다. 포기해야 모두가 편해지는 쪽은 떠나는 쪽이다만, 안되면 어디까지 안 되는 건지, 더 밀리지 않을 때까지 머리를 들이밀어 봐야 포기가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일을 구하는 쪽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든 구해질 것이겠고 (혹은 눈을 낮추면 언제든지 구해질 테고) 떠나는 쪽은 포기하지 않더라도 이루기 힘들 것이다. 어차피 안될 가능성이 크니 나중에 생각이나 많아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건 다 쏟아 보고 그만 두자, 그런 마음이었다. 각종 장학금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은행이란 은행은 다 찾아갔다.

학부 때 학자금 조금밖에 안 빌렸는데 지금 마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마음을 다해 물었지만 원체 우문인지라 메아리조차도 돌아오지 않았다.

                


희생이 따른다


2010 8, 첫 개인전 때 이런 인터뷰를 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그때 그 말을 못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이 짧은 이유는 그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부수적인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에는 내 짐을 나눠 들어주는 주변 사람들의 희생도 따른다.

그래, 해보라고. 되는데 까지 해보자고. 죽기야 하겠느냐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가족들의 도움으로 대출금을 마련했고, 세 살 어린 동생까지도 내게 생활비를 보태었다. 엄마의 편지에는 당신의 한과 꿈이 가득 실려 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좋은 기회를 살려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배우길 바란다.

엄마 이 십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이란 걸 덥석 해버려 꿈도 희망도 없이 습관처럼 힘겹기만 했지만

(너희들을 낳아 기른 것 빼고는......)

너희들은 정말 원 없이 청춘을 보냈으면 좋겠다.

젊음은,

이 십대는,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인 것을 너희는 잘 모를 거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15년만에 대학졸업,

30년만에 대학원 졸업한 엄마를 보면서

지금 마음껏 젊음을 누려라......'

 

  

공항으로

 

청아한 아침. 출근길 정체를 피해 꽤 이른 시간 올림픽 대로 위를 달리고 있다. 라디오를 켜자 익숙한 목소리가 경쾌하게 차 안의 침묵을 밀어낸다. 문득, 생각했다. 혹독했던 계절 내내 카페의 얼음장 같은 적막을 깨뜨려 주던 그 목소리에, 단 한 번이라도 감사를 표한 적이 있었는가를. 손도 바쁜 와중에 마음까지 바쁘게 애쓸 일 없도록 매일의 시작을 도와준 목소리였는데 말이다. 카페를 그만 둔 후 이제까지 다시 라디오를 틀 겨를이 없었지만, 앞으로도 한참은 들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작별 인사를 할 때. 나는 곧 긴 휴식에 접어들게 될 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몇 자의 감사와 안녕을 실어 보냈다. 여느 때처럼 퀴즈의 정답을 맞추려는 것도, 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인사를.

그런데 여의도를 지나는 순간,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르며 살갑게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가게 되어서 얼마나 좋으냐고, 오래 걸린 만큼 잘 할거라고, 그곳에서도 종종 소식 달라고,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노라고.   

그래, 미안한 맘 덜어버리려다 또 그렇게 갚지 못할 빚을 지고 말았다.

그의 황송한 배웅을 받으며, 하루 대신 긴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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