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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5

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역시 잘못 온 것일까?


브리즈번 시내의 번화가를 걸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지나가며 흘리는 수많은 대화들 때문이었다오랜만에 듣는 모국어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빛의 속도로 빨려 들어와 뇌를 때리고 있었다듣고 싶지 않은데도 너무나 소상히 들려오는 그 왁자지껄한 소리들긴 시간을 타 언어권 사람들과 보내고 나면 신경 써서 듣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귀가 평소보다 열려 있게 된다그러한 상태에서 갑자기 다시 모국어를 듣자면 쓸데 없는 나방 같은 정보들까지 다 채집되는 것이다한국에 돌아가면 또 한 달 정도는 이런 현상에 시달릴 것인데……어쨌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곳에서 나는 스스로 무인도가 되어 보기로 했다. 외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할 것도 없는, 그저 언제나 그렇게 있었던, 외로움 같은 단어가 적힌 사전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런 무인도.


바닷가엔 웃통을 훤히 드러낸 서퍼들이 가득했다. 야자수와 붉은 샤론꽃들이 즐비한 언덕 아래로 새하얀 포말이 흩어지고, 광원을 삼킨 듯한 바다는 어마어마한 양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반사된 태양빛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그 근원이 무엇이건 간에, 그 광경은 어떠한 깊이의 생각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도록 내 머릿속을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고 여기가 천국이네, 지상 낙원이네, 하는 감탄 같은 것이 우러나오지는 않는다. 잠시 현재를 차지한 새로운 종류의 자극일 뿐길게 머물지 않을 곳에 깊은 환상을 채우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어느 가정집 아래 빈 공터를 빌려 작업실로 삼고 남아있던 모든 재료들을 소진했다. 그린 그림들은 1점을 제외하고 모두 감사의 표시로 남겨 두고 떠나왔는데, 결국 손에 들고 있던 그 그림도 시드니를 경유하는 길에 만난 미국인 가족에 선물로 건네고 말았다. 나와 동갑인 한국인 입양아를 딸로 둔 집이었다


완전히 빈 손으로, 인천을 향한다.   




돌돌 말아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그림. 입양된 그 친구에게 잘 전달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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