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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생활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10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졸업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2011년 여름 날아든 반가운 소식은 나의 다음 행선지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의 지역 예술재단 메클렌부르크 인스피리엇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 작가로 선정된 것이다. 회화 작가로는 내가 유일했기에 더욱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치, 영상, 사진, 공예, 춤, 음악 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지원한 공모였다. 레지던시 공모 결과. 가장 상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어찌나 두근대던지. 가을에 접어들면 또다시 어둑한 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할 런던을 벗어난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지만 주변 영국인 친구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독일 북부라고?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 더보기
로빈과 이안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9로빈과 이안 석사과정의 커리큘럼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제나 소재를 던져주면 ‘알아서’ 결과물을 만들어 오는 것이다. 진행 과정에서 두 세 명의 교수 혹은 강사들에게 꾸준히 조언을 듣는다. 조언이 필요한 만큼의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발표를 할 때마다 메인 교수 로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잠깐, 그건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데?’ 였다. 처음 입학허가를 받던 시점부터 우려했던 부분들이 슬슬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작업의 흐름은 그 형태적으로는 점점 더 추상에 가까워져 갔고, 불행히도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단어는 ‘예시를 들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재구성하고 표현하려는 대상 자체.. 더보기
런던에도 봄은 오더라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8런던에도 봄은 오더라 오후의 나른함이 드리운 방 안의 공기가 거짓말 같다. 결국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오로라 주의보에 의하면, 그날은 연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오로라의 세기가 강한 날이었다. 핀란드 국경까지 달렸지만 두터운 눈구름은 손바닥만치도 걷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아쉽지가 않은 것은, 우리가 제대로, 다시, 어느 좋은 날에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마주쳤다면, 내가 소원해온 시간들이 더욱 아쉬웠을 지 모를 일이다. 언제이고, 그 겨울로 나는 돌아갈 것이다. 삭막한 도시와 고요한 항구를 지나 2주 만에 돌아온 방에는 봄이 가득 들어차 있다. 정원의 풀꽃들이 문틈으로까지 얼굴을 내밀고, 창 밖엔 팝송에나 가끔 등장하던 블랙버드가 까르르 기웃.. 더보기
새 집과 프랑크푸르트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6새 집과 프랑크푸르트 피신해 있는 동안 다행히도 근처에 빈방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인도계 영국인 가족이 살던 집인데 이사를 가면서 세를 놓는 중이라고. 집세가 조금 높긴 했지만 급하게 들어갈 방을 찾은 것도 감지덕지였다. 빈 방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 보이는 다용도실이었고, 집주인이 직접 만든 바가 한쪽 벽에 비치되어 있었다. 파티용으로 쓰던 공간인데 집주인 아들이 꼭대기 층에 계속 살 예정이라 술병들은 그대로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생활패턴이 비슷한 한국인 플랏메이트를 구해 함께 지내기로 했다. 건축학도인 H는 말이 잘 통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네일 아트 기술로 런던 땅에서 남부럽지 않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멋진 친구였다. 술병이 가득한 찬장은.. 더보기
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5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매일 매일 닥쳐오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쳐낸다. 그런데, 그 뒤에 남겨진 응어리들을 마저 비워내는 작업은 으레 내 공간 안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에 주로 하던 일이다. 아, 그러나 지금 그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소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집세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을 셰어하는 형태로 집을 구했던 터라 모든 것에 룸메이트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책상 위 스탠드를 켜놓는 것 조차도. 생활 패턴이 정 반대인 동유럽계 회계 전공 학생을 만난 것도 불운 아닌 불운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지만 잔병치레가 잦아 은근히 신경을 써야 했다. 완전히 무장해제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없기에 별도의 작업 공간이 절실했지만, 학교에서.. 더보기
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2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얄궂은 이곳 한기는 가슴 속 온도계를 단번에 부러뜨리고도 시치미를 떼기 일쑤다. 영상 7도 따위에 뼈가 시린 느낌을 받는다는 건 꽤나 굴욕적이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단열이 잘 되지 않는 구조의 건물들 천지라 어느 한 곳도 마음 편히 추위를 털어낼 자리가 없는 것이다.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환영하던 나인데, 오후 4시부터 아득하게 깜깜해지는 이 스산한 겨울은 심히 당황스럽다. 이 영리한 도시는 무섭도록 어둠이 스미는 이 긴긴 겨울 터널을 무엇으로 심심치 않게 넘길 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크리스마스가 늦가을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청으로 암전되어가는 하늘 위로 금테를 두른 오색 행성들이 떠올랐고, 푸른 눈송이들은 그물이 되어 칠흑을 꽁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