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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10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졸업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2011년 여름 날아든 반가운 소식은 나의 다음 행선지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의 지역 예술재단 메클렌부르크 인스피리엇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 작가로 선정된 것이다. 회화 작가로는 내가 유일했기에 더욱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치, 영상, 사진, 공예, 춤, 음악 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지원한 공모였다. 


레지던시 공모 결과. 가장 상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어찌나 두근대던지.




가을에 접어들면 또다시 어둑한 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할 런던을 벗어난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지만 주변 영국인 친구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독일 북부라고?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걸? 날씨에 대한 기대는 접는 게 좋을 거야."

 

물론 나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2주에 한 번씩 들이치는 발트해의 살벌한 폭풍을 온몸으로 체감하기 전까지는. 


발표가 난 직후, 독일에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준비하기 위해 8월 중 3주가량 시간을 내어 한국에 머물렀다. 비자 종류는 여차하면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선택했다. 영어권이 아니다 보니 여타 국가들처럼 경쟁률이 치열하지는 않았고 발급에 2주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런던 복귀 후 9월 말 졸업 전시까지 바쁘게 쳐내고 나니 독일로 떠날 날짜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졸업식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숙소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포기해야 했다.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집을 구하다 우연히 알게 된 89학번 선배님들 댁에서 하숙 아닌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산업디자인과 캠퍼스 커플 출신으로 영국 땅에서 두 아들을 훌륭히 키워내신 분들이었다. 함께 하숙을 하는 친구들도 잠시 교환학생으로 온 대학 후배를 비롯, 유쾌한 사람들이라 이곳저곳 함께 놀러 다니기도 했다. 차갑기만 했던 시간들 위로 처음 가족이라는 이름의 온기가 덮이는 순간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가득 들어 찬 히드로 공항에서 마지막 커피를 들며,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한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던 2011년 10월 7일, 히드로 공항.



이제까지 잠깐이라도 스쳐왔던 모든 도시들 중에서, 런던은 그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의 모습이 가장 다른 곳이었다. 사람들도, 공간의 색도, 학업에 관한 것들도, 부딪쳐오는 삶도. 그러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 간극 조차도 결국 이 도시의 일부분임을, 이제 나는 마음으로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속 실체의 세계에 런던 한 조각을 이어 붙인다. 각종 매체들이 ‘런던’이라는 이름 위에 증식시킨 환상조차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만큼의 부피로 실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공기처럼 깨닫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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