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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런던에도 봄은 오더라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8

런던에도 봄은 오더라


오후의 나른함이 드리운 방 안의 공기가 거짓말 같다.  


결국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오로라 주의보에 의하면, 그날은 연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오로라의 세기가 강한 날이었다. 핀란드 국경까지 달렸지만 두터운 눈구름은 손바닥

만치도 걷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아쉽지가 않은 것은, 우리가 제대로, 다시, 어

느 좋은 날에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마주쳤다면, 내가 소원해온 

시간들이 더욱 아쉬웠을 지 모를 일이다. 언제이고, 그 겨울로 나는 돌아갈 것이다. 


삭막한 도시와 고요한 항구를 지나 2주 만에 돌아온 방에는 봄이 가득 들어차 있다. 

정원의 풀꽃들이 문틈으로까지 얼굴을 내밀고, 창 밖엔 팝송에나 가끔 등장하던 블랙

버드가 까르르 기웃거리고, 창가엔 벚꽃이, 길가엔 수선화가, 꽃집엔 튤립이 가득가

득 늘어섰다. 집 앞 조그만 잔디 공원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든 무

리들이 웃옷을 벗어 던진 채 벌렁 드러누워있다.  


긴 겨울의 끝. 나만큼이나 모두들 햇빛이 그리웠나 보다.  


곧 이어진 4월은 올 해 유독 찬란하여, 가끔은 내가 지금 호주의 어느 길을 걷고 있

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상황도 이 계절만치 아름다우면 좋으련

만, 오늘은 이제 겨우 정든 작업실을 정리해야 한다. 겨울 반절에 봄 한 마디를 더한 

시간 동안 쌓인 작업과 잡동사니들을 한데 묶으니 양 손과 어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버스의 종점인 노스그리니치역에 내리는 데, 뒤에서 한 여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손에 든 게 네 그림이니? 뒷자리에서 보고 있었는데 아주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어. 

행운을 빌어!”   


너무 커서 묶지 못하고 한 손에 따로 들고 있던 그림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답을 바

라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은, 이 날 종일토록 펼쳐진 알 수 없는 위

로의 예고편이었다. 위로는 타인의 말 한 한마디에도, 묵언의 행동에도, 또는 현장성

을 넘어선 우연에도 깃들어 있다.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환승역에서는 몇 번이나 덩치

가 좋은 흑인들이 웃으며 짐을 번쩍 들어다 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갑갑한 런던 

지하철을 빠져 나와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온 몸에 힘이 빠짐은 물론 헐거워진 노

끈 틈새로 의자며 그림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버려버리고 도망치고 싶

은 심정이었다. 


“도와줄까요?” 


때마침, 퇴근길인 듯한 아저씨가 선뜻 도움을 자청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한 

블록 건너편에 산다고 했다. 이름은 요한. 영국계 이름은 아닌 듯 했다. 고마움에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홈페이지가 적힌 명함을 건넨 뒤 헤어졌다. 짐을 보면 작가인 

것을 알 테니 나중에 궁금해지면 둘러보시라는 뜻에서였다. 이만치도 내겐 하루 온종

일이 과분한 위로였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모든 위로의 종지부를 찍는 메일이 날아왔다. 요한이었

다. 그림을 주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특정한 요구사항 없이 자유롭게 그려주기

를 원했다. 알고 보니, 그는 IT업계에 몸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수입의 일정

부분은 늘 예술품을 구입하는 콜렉터였다. 아마추어 작가라는 이모님의 영향이 큰 모

양이었다. 가족은 남아공에 있고, 이름은 아주 오래 전에 남아공으로 이주한 네덜란

드 선조들의 흔적이라고.  


요한이 미리 조달해준 재료로 작품 두 점을 그리면서 나는 얼마 간의 집세를 해결하

였고, 유럽을 홀로 여행 중이던 여고동창과 시기를 맞추어 호사스럽게도 한 주 간의 

이태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필연적 우연으로, 어느덧 위로가 끼어들 틈 

없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봄이었음을, 숨막히도록 반짝이는 여름이 이내 증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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