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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노르웨이에서의 3일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7

르웨이에서의 3일


처음부터 계획한 여행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행 저가항공권을 구입하던 중 마우스 

휠을 잘못 굴리는 바람에 돌아오는 도시를 오슬로로 잘못 선택했던 것이다. 유럽 저

가항공사들은 항공권에 찍힌 이름 한 자 고치는 데도 항공권 값의 두 배 이상을 청구

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엔 그냥 다른 항공권을 사는 게 노선을 바꾸는 것보다 더 저렴

하다. 어차피 산 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런던에서 알게 된 연수생 D가 본인도 

북유럽 투어를 계획한다기에 며칠 동참하기로 했다.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넘어가는 

저녁에 합류하여 최북단 트롬쇠까지 갔다가 D가 스웨덴으로 건너갈 때 헤어지는 일

정이었다. D가 노르웨이에 할당한 기간은 겨우 4일이지만 그 중 무려 이틀을 오로라

관측지인 트롬쇠에 양보해 주었다. 오로라를 보는 것이 꿈이었던 나를 배려한 동행이

었다. 아시아권에서 스튜어디스 생활을 오래했다는 D는 인생 선배이지만 아이 같은 

천진한 면이 있다. 그러하기에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안정적인 삶을 뒤로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누가 들어도 혹할 만한 청혼들을 거절하고서 말이다.  


런던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지만, 여행 중에도 D의 단아한 외모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현지인들이 꽤 있었다. 일례로 오슬로의 호스텔 로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연주가는 오밤중에 우리에게 신기한 악기들로 가득한 작업실 구경을 시켜주었다. 

노르웨이인임에도 중국어에 능통해서, 아직 영어가 서툰 D와는 중국어로 대화를 이

어갔다. 세 사람 모두 가지고 있는 런던 유학 경험,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의 현대화

에 대한 사담들을 밤늦도록 나누다 헤어졌는데, 아침 일찍 베르겐으로 이동해야 했기

에 그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수개월 후, D에게 우스갯소리로 노르웨이 이후로

도 인기가 좋았는가를 물었더니 스웨덴 어느 보석상 주인이 호감을 나타내면서 목걸

이를 주었다고 했다. 미인으로 산다는 게 피곤한 일이라고는 하나, 삶에서나 여행에

서나 일정 부분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킹스오브컨비니언스의 본거지로 알려진 베르겐으로 향하는 내내, 평소 자주 듣던 그

들의 음악을 수없이 곱씹었다. 오늘에서야 나는 환경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졌을 그들

의 음악적 선택 하나 하나에 다시금 동의하게 되었다. 저 눈밭을 메우기에는, 저 수면

을 흔들기에는, 그 나지막한 울림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목소리가 두터운 

음색으로 이루어진 무거운 화음이었다면, 아마도 일찌감치 협곡 아래로 가라앉지 

않았을까.  




베르겐의 한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고, 진눈깨비 흩날리는 어둑한 항구를 걸었다. 세

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오랜 상점가의 건물들은 너무나도 낡아 어깨를 맞붙이고 

힘겹게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포근한 고요함이 내려앉은 이 작은 항구는 도무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행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 길을 물어도 유창한 영

어로 답이 돌아왔다. 어린 여학생부터 백발의 할머니까지, 내가 필요할 만한 것이라

면 묻기 전에라도 무엇이든 말해주려는 듯 보였다. 상점 안에 진열된 것들은 그것이 

식품이건, 상품이건, 가구이건,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런던은 물가가 

싸서 살기 좋다던 노르웨이 학생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구나, 하며 딱딱한 빵에 생선

맛 페이스트를 곁들여 허기를 채웠다. 조금 전 어시장에서 맛 본 연어가 눈에 어른거

렸지만, 런던에서 사는 것 보다 오히려 비싼 산지 가격에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수기의 유스호스텔답게, 나와 D가 머무는 4인실에 들어온 손님은 환경학회에 참여

하러 온 모로코 여자뿐이었다.     






이튿날, 송네 피오르드를 만나기 위해 굽이굽이 달리는 플램스바나 열차를 타고 플램 

역으로 향한다. 창 밖엔 얼어붙은 산수화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산

과 연녹빛 얼음 폭포들, 원색의 집들, 드문드문 보이는 눈 덮인 강과 마을들…….  


나의 오염된 생각이, 구차한 시간이 꽁꽁 얼자, 기다렸다는 듯 차창 밖 휘몰아치는 

바람이 거두어 간다. 나는 지금, 그것들이 설탕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는 광경을 목도

하고 있다.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도, 바람은 제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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