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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5

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매일 매일 닥쳐오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쳐낸다. 그런데, 그 뒤에 남겨진 응어리들을 마저 비워내는 작업은 으레 내 공간 안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에 주로 하던 일이다. 아, 그러나 지금 그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소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집세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을 셰어하는 형태로 집을 구했던 터라 모든 것에 룸메이트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책상 위 스탠드를 켜놓는 것 조차도. 생활 패턴이 정 반대인 동유럽계 회계 전공 학생을 만난 것도 불운 아닌 불운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지만 잔병치레가 잦아 은근히 신경을 써야 했다. 완전히 무장해제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없기에 별도의 작업 공간이 절실했지만, 학교에서 해결해 준다던 작업실 문제는 도무지 처리될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전 졸업생들이 전년에 쓰던 작업실을 프로덕션 디자인 과가 차지했는데 그쪽에선 전혀 돌려줄 기색이 아니었다. 학교 측에서는 중재안도, 추가 공간 확보 계획도 내놓지 않았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업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도무지 구현할 수 없는 특정한 틀을 차용하고 있는데, 더욱 큰 문제는 공간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는 그것들을 만들어 낼 작업 공간이 없고 둘째로는 그 모든 갈등을 분쇄시킬 심적 공간이 없다.

 

총체적 난국.

절망이다.   

 

3개월 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룸메이트와의 정서적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고,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결국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싱글룸을 찾아 이사를 했다. 외부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한껏 수축되어있던 마음을 호흡시키기 위함이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중국인 부부의 집이라 부엌이나 복도는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지만 비좁은 방 한 칸만큼은 비교적 깔끔했다. 사실 발 디딜 곳도 없을 만큼 초라했지만 드디어 고요를 쟁취했다는 안도감이 나를 감쌌다.

 

염원하던 작업실을 구하게 된 것도 커다란 위안이었다. 2인 작업실이지만 광고를 낸 사람이 취미로 미술을 하던, 이제 막 학업을 시작한 주부라 거의 나 홀로 공간을 쓸 수 있었다. 런던 동쪽 끝, 템즈 하류 근방에 위치한 새 컨테이너 스튜디오 단지. 작업실 문을 열고 나오면 신 시가지인 카나리워프 스카이라인이 수면 위로 반짝였다. 집까지 왕복 세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만한 작업실을 그 값에 얻기는 서울이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나쁠 건 그다지 없는데,

멍든 다리와 시린 손목과 입김 나오는 방 안 공기에

꿈을 꾸듯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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