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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2

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얄궂은 이곳 한기는 가슴 속 온도계를 단번에 부러뜨리고도 시치미를 떼기 일쑤다. 영상 7도 따위에 뼈가 시린 느낌을 받는다는 건 꽤나 굴욕적이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단열이 잘 되지 않는 구조의 건물들 천지라 어느 한 곳도 마음 편히 추위를 털어낼 자리가 없는 것이다.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환영하던 나인데, 오후 4시부터 아득하게 깜깜해지는 이 스산한 겨울은 심히 당황스럽다.  


이 영리한 도시는 무섭도록 어둠이 스미는 이 긴긴 겨울 터널을 무엇으로 심심치 않게 넘길 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크리스마스가 늦가을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청으로 암전되어가는 하늘 위로 금테를 두른 오색 행성들이 떠올랐고, 푸른 눈송이들은 그물이 되어 칠흑을 꽁꽁 싸맸다. 번쩍이는 선물들과 눈 결정이 내려 앉은 우산이 거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띄워졌으며, 눈에 별을 박은 사람들은 쇼핑백이 주렁주렁한 팔을 들쳐 올리며 바쁘게 셔터를 눌러 댔다.


한껏 들뜬 분위기 속, 고즈넉한 카페의 뿌연 창 너머로 스르르 번지는 불빛들의 움직임을 좇다 보면 마음 속 체기가 잠시 내려간다. 환희의 공간을 벗어나 집에 가까워 올수록 거리의 장식들은 형편 없지만, 그저 그렇게 있음으로도 가셔가는 온기를 잊지 않을 수 있다. 누구도 그 이상을 기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귀갓길. 생과 사를 힘겹게 구분 짓던 낡은 개신교 교회의 얕은 담장이 눈보라에 쓰러질 듯 위태하다. 담장 너머 촘촘히 선 묘비들이 나의 옆 얼굴을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대로 경계가 사라지고, 나의 살아있음 또한 무효화되지는 않을까. 걸음을 재촉하지만 오르막이 버겁다. 그러다 불현듯, 낮에 마주쳤던 길가의 장미꽃이 떠올랐다.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축 늘어진, 그러나, 그럼에도, 생기를 놓지 않은 그 살굿빛 얼굴을.


참으로 묘한 도시다. 런던은.


죽게 하는 것과 살게 하는 것이 극명하나, 모두가 뒤섞여 흩뿌려져 있다. 재 속에 굴려 놓은 사탕 같다. 누구든 머뭇거리나, 곧 별 수 없이 집어 먹게 된다. 그것이 양약은 못되나, 그 안에는 그런대로 살아지도록 하는 어떤 달콤함이 있다. 딱히 힘이 된 것은 아니나, 그만큼 살아진 것도 내 덕이라며 생색은 낼 만큼 내 준다.


그런 것도 매력이라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용의는 있다.


그래, 차가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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