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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런던에 속았다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1

런던에 속았다





공항에서부터 내리쬐던 찬란한 가을 볕 탓에, 런던은 본디 이리 따사로운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을은 다급히 그 조명을 거두고 겨울로 이어지는 어둑한 구름 천막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빛 꺼풀이 벗겨진 이 오랜 도시가 굳은 표정으로 그 본연의 검붉은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섬뜩함마저 느꼈지만, 내 안에 술렁이는 그 기류 위에 ‘상실감’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래선 안 된다고.


학교도, (누구나 떠올리는 런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시내도 모두 내 생각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 흩뿌려야 하는 것이다. 지하철과 기차를 매번 갈아 타며 통학하려면 한 달 교통비가 그저 만만치 않은 정도로 끝날 리 없다. 결국 노선이 길더라도 버스를 타는 게 생존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차창 밖 풍경은 어디가 어딘지 모를 낡고 붉은 집들의 연속이다. 집집마다 쓸모 없이 남겨진 굴뚝의 수를 몇 백 개쯤 세어야 내가 가야 할 어딘가에 도착한다. 가끔 마주 오거나 타고 내릴 때 잠깐 보고 마는 빨간 버스의 외관이, 매일 볼 수 있는 것들 중에는 가장 예쁘다.


사람도, 도시도, 그 무엇이라도, 그를 부딪쳐 겪어보기 전까지는 내 안에서 실재하지 못한다. 언제나 허상을 먼저 붙잡고 있는 셈이다. 그것들은 대개 본 대상의 실제 모습에 입각하여 형성되지만, 쉬이 뒤틀리고 뒤섞여 본래의 그것과는 다소 상이한 무언가로 재탄생 된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각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형된 파형으로 끝 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숱한 첫인상들의 중첩 위에 때로는 특정 대상과 이해관계에 얽힌 주체들이 의도적 이미지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를 덧입히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런던에 속았다는 말은, 그저 가만히 이 자리를 지켜온 런던에게는 가혹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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