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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색채의 곳간 피렌체

런더너의 막간 이태리 여행 │  색채의 곳간 피렌체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긴 사흘이라는 시간을 할애한 도시는 피렌체였다. 온갖 후기를 섭렵한 결과, 베니스보다는 피렌체가 볼거리가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 마음에 드는 곳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가도,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도 개의치 않는 여행 동지들과 함께여서 가능한 일정이었을 것이다. 각각 문학과 패션을 전공한 친구들과 서로의 관심사와 소회를 나누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었다. 

혼자서라면 가볼 생각조차 못했을 페라가모 본점이라든가, 진정한 육식 마니아들만이 접시를 비울 수 있는 특대형 스테이크 전문점 같은 곳들을 방문하며,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취향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단조로운 톤이 주를 이루는 한국의 명품 매장과는 달리 존재감을 과시하는 듯한 형형색색의 가죽 제품들이 벽 전체를 메운 모습은 거대한 설치미술 작품을 방불케 했다. 스스로 육식동물이라 자만했던 세월이 무색하게, 내 앞에 놓인 고기의 절반은 결국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나는 채소를 곁들인 한국형 육식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메뉴판에 시금치 요리가 있기에 급히 주문해 보았지만, 강렬한 향의 치즈와 진한 버터에 푹 절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금치는 오히려 포크를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되었다. 

거나한 식사를 마치고 분홍빛 노을을 감상하며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를 즈음, 한껏 들뜬 표정의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단지 야경을 보기 위해서라 생각했는데, 무리들이 모여 인파가 될 즈음에야 카페 직원에게 물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은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산 지오반니(피렌체의 수호성인)를 기리는 축일로, 성대한 불꽃축제가 바로 이곳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석양을 볼 요량으로 언덕 위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디저트를 주문하던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가 앉은자리가 바로 불꽃놀이 명당이었던 것. 무계획이 일상인 우리에게 이 특별한 액티비티는 평소에는 마주칠 수 없는 기적이자 행운이었다. 

자연이 지시한 암전으로 인해 이미 사람들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의 설렘 가득한 재잘거림만 간간이 들려왔다. 마침내 첫 번째 불꽃이 솟아오르자, 일제히 쏟아져 나오는 탄성에 축제의 분위기도 한껏 무르익었다. 편안하게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즐기며, 코앞에서 별처럼 부서져 내리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구석구석 삭여 둔 시큼한 감정들도 함께 씻겨 내리는 기분이었다. 얼어 있던 생각의 회로들이 불꽃의 함성에 밀려 가동되기 시작했다. 가벼운 불행도 스치는 행복도,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물에 젖은 솜처럼 온몸을 누르기도, 또 헬륨 풍선처럼 마음을 띄우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지나가지만, 우리의 타임라인을 곱게 수놓는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또 빛나면 빛나는 대로.   

이튿날,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본 조토의 종탑은 그를 감싼 짙은 초록과 고고한 적색, 순백의 진주빛 대리석들로 쏟아지는 햇살을 머금었다 이내 흩뿌리며 숨을 쉬는 듯했다. 과연 화가의 건축물다웠다. 몰려드는 방문객 수에 비해 공간이 비좁다 보니 오랜 시간을 머물 수는 없었지만, 아쉬운 대로 그날의 감상을 드로잉북에 남겨 두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붉은 지붕들 속에서 또 다른 빨강을 발견하는 일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조토의 종탑과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
조토의 종탑 드로잉
붉은 지붕 위 빨간 파라솔 가든


두오모 근처의 작고 아담한 종이 공방에서는 물 위에 기름을 띄워 마블링을 만든 후 종이에 찍어내는 시연을 하고 있었는데, 안료를 양 떼 몰이 하듯 문양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평소 캔버스나 종이에 물감을 먼저 뿌려놓고 색의 움직임을 의도하는 나의 작업 방식과도 연관성이 있어, 모양이 다소 흐트러진 종이 몇 장을 샀다. 그것이 내게는 더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판매 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으로 분류되어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나 멋진 불균형이다. 그러므로 배로 멋진 행운이다.

명화들이 가득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이나 로마 바티칸에서는 군중과 카메라에 떠밀려 작품을 오롯이 감상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히려 미술관 밖 곳곳에서 창조적 에너지원을 채굴할 수 있었다. 색채의 곳간 피렌체에서 만난 크고 작은 행운들은 이후 다가올 잿빛 폭풍을 헤치는 귀중한 연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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