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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반짝이는 베니스의 청록

런더너의 막간 이태리 여행 │  반짝이는 베니스의 청록

 

아름답게 낡아간다.
새로워질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베니스의 크고 작은 섬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삶의 자세였다. 베니스를 둘러싼 거대한 청록의 물결은 이 낡은 도시를 1초도 쉬지 않고 넘보고 있었다. 청록은 도시의 외벽에 스며들어 하나씩 둘씩, 소금기에 해진 칠과 무른 흙을 거두어 간다. 그럼에도 앙상한 벽돌을 훤히 드러낸 건물들은 현재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네들이 그렇게 존재하듯 누구에게도 새로워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쓰러지지 않도록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기초를 이따금씩 보강할 뿐이다.  

로마와 피렌체도 멋진 도시였지만, 이번 여행 중 마음의 고삐가 탁 풀리는 편안함을 느낀 곳은 베니스가 처음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이틀을 해먹 같은 이 도시에 기대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수상버스 바포레토나 곤돌라 같은 작은 선박들을 제외하면 온전히 두 다리로만 움직일 수 있는 이곳은 자동차의 공해와 소음으로부터 무한히 자유롭다. 비좁은 골목골목이 맞닿는 작은 광장에서는 거리의 악사가 시타르를 닮은 이름 모를 전통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손을 맞잡은 연인은 앞이 아닌 서로의 미소를 바라보며 걸었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작은 개는 열심히 제 집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리로 만든 총천연의 꽃과 풍선들은 상점 곳곳의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었고 아직 무도회에 나서지 못한 가면들 또한 금빛 테두리를 뽐내며 그 옆 자리를 채웠다.

“누가 베니스에서 볼 게 없다 그랬지?” 친구와 서로 반문하며, 하루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했다. 잠시만 시간을 돌려 피렌체에서의 하루를 베니스로 옮겨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동네 산책하듯 이 섬, 저 섬을 터덜터덜 걸으며 숨겨진 로컬 맛집도 찾아내고, 따사로운 볕 아래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와도 조우했다. 베니스의 거리는 셀 수 없는 색과 다양한 재질, 재미있는 질감을 동시에 품고 있었지만 도시 전체를 감싼 바다의 청록과 그 반짝임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한낮의 태양을 머금은 베니스의 넘실거리는 바다는 거리에서 본 모든 감상들을 순금에 섞인 1%의 불순물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바다는 언제나 너그럽지는 않지만 작은 존재를 부정할 만큼 옹졸하지도 않은 것이다. 

아름답게 낡아가는 베니스에, 인생의 한여름을 지나는 청년의 때에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이곳의 청록을 듬뿍 담아간다. 이 청록은 시시때때로 우리 가슴을 치며 겸허히 늙어갈 수 있도록 헛된 잔상들을 거두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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