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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미완의 에세이 Essays

서울 #4. 한 달을 울었다


한 달을 울었다

 

어느 곳을 가도친절한 은행 직원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사정은 알겠지만해외 대학으로 들어가는 학자금은 대출이 불가능해요.

날이 갈수록 국제교류센터 조교님은 답을 재촉해 왔다학기가 2 23일에 시작이라니 1월 안에는 답을 드려야 했다설탕이 다 떨어져 가는 솜사탕 기계 노즐에다 젓가락을 휘휘 돌려 대는 것 마냥나는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뽑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연말에 시간표까지 적힌 수학허가서를 전달받자나의 온 몸엔 헬륨가스가 차 올랐다가느다란 정신줄만 놓으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모양새로.

 

귀국 직전 캔버라에 머물면서 매일 같이 보던 그 하얀 건물이 머릿속에서 만져지는 듯 했다. 크지 않아도 아늑했던, 햇살 가득한 미대 도서관과 깔끔한 교내 갤러리들그리고 널찍한 작업실도그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면서 '꼭 한 번 다녀보고 싶다.' 생각했었다석사는 그 자리에서 퇴짜를 맞았어도이제 한 학기는 다닐 길이 생겼다이렇게 멍석이 깔려있는데도 단지 금전적인 문제에 떠밀려 다 잡은 기회를 놓아야 하는 현실에 너무나 속이 상했다내가 가진 자질들은 혹시 주인을 잘못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기 시작하면서약간의 우울증이 찾아왔다혼자일 수 있는 모든 순간 마다 웅크리고 앉아 울고 또 울었다놀기도 싫었고 일할 힘도 없었다그러던 어느 일요일둘둘 말아 꼬깃꼬깃해진 마음 속으로불현듯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너를 항상 믿는데넌 왜 나를 믿어주지 않니?

아마도 마음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격언이나 설교더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을 것이다나는 다소 비뚤어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난 신경 끄고 걱정 안 할 테니까뭘 어떻게 해 보든가요!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투정부리며 던져버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내 계정에 수상한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ANU에서 보낸 메일이었다학비를 낼 필요가 없으니 보험료 200불 정도만 내고 학기를 시작하라는 내용이었다일반적인 교환학생 처우를 받게 된 것이다분명히 지난 번엔 학비가 고스란히 적힌 서류를 보내왔는데,눈을 씻고 다시 읽어 보아도 학비를 면제시켜 주겠다는 말이었다결국은 본교 학비에 대한 국제교류장학금을 받는 동시에 상대학교 등록금은 면제처리가 된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를 하지만나는 학기를 마치고 졸업하기까지 학교 관계자들을 피해 다녔다혹시나 나를 붙잡고행정 착오였으니 다시 학비를 내라고 할까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ANU의 성적처리가 본교 졸업대상자 전산입력 기한을 넘기는 바람에 8월 졸업이 무산되었음에도나는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다그리고 2010 2못 본지 오래인 학우들 사이에서 심히 어색한 모습의 졸업사진을 남겼다.

 

꽤 소심한 마무리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때 나는 간절했었고,

비밀에 부쳐진 기적은 그렇게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