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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s Note/단상 fragmentary thoughts

크리스마스, 이별.




소설이나 드라마 속, 

플롯을 짜맞추기 위해 억지로 맺어진

그런 끝을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이란.


달갑지도 않고 실감조차 나지 않는

이별이 찾아들었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그것도 이른 새벽에.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짝 곤두세웠던

내 모든 것들을 풀어헤친 채 그렇게 

나는 여하간 조금은 들떠 있었고

조금은 취해 있었고,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에 조금은 서운했지만)

마음이 닿을 수 있는 모양 대로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통화시간이 길어질수록 드는 생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우리.'


폭풍이 지나고, 섬광이 스친

두 차례의 전화.


누구도 끝을 말하려던 밤은 아니었지만,

끝이 아니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값의 방정식이었다.


이상적 순간이라 여겼던 찰나의 뭉치들은 

어느 하나 완전하지 못했다.


내가 행복했던 순간에는

그가 온전히 행복할 수 없었고, 

그가 행복했던 순간에는

내가 또 그러했다.


함께 그린 2년 3개월은

그렇게 전혀 다른 방향의 선들로 메워졌다.

하지만 이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나는 감사를 표했다.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던

당신을 만나 얻게된 자신감, 

음악적으로 받았던 영감,

그로 인해 달라진 많은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안녕을 기원했다.

결혼은 사랑의 종말이라며 끔찍해하던 그의 바람 대로,

평생을 연애할 수 있는 이상적 상대를 만나기를.

건강을 되찾기를. 

좋은 일을 구하기를.


되돌아 보면 그는 종종, 

내가 왜 나의 작품 만큼이나 커다란 스케일의 

행동 양상을 띠지 못하는가 의아해 했었다. 


독일 레지던시 기간에 만났던 

아르메니아 음악가 루시네도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 의식은 네 작품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고. 

아마 상황이 좋지 않다며 징징대는 어린 아이 정도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결과로 증명해 줄 수 있다. 

나는 그녀가 고집하는 방향으로 끝까지 가 준 후 

정확한 방향을 다시 제시해 주었다.

그녀는 이 방식마저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결국은 매우 미안해 했다.


맥락은 다르지만, 나는 결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를 단순히 부정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려 한다면, 

사람마다 사건에 대한 접근과 해결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사랑이라는 것 앞에서 나는, 

냉철하지도 못했고 마음 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했다.

 

다행히 누가 술에 기대든 어색치 않은 연말이라,

마음이 소독될 정도의 충분한 알콜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해가 바뀐 지금은 지난 모든 것이 꿈인듯 느껴지지만,

이것만은 간직해 두려고 한다.

내 '처음'의 무게를 감당해 준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 

그 하나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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