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s Note 썸네일형 리스트형 2014.3.25 새벽.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걷는 내내 입에 무언가를 털어넣고 와그작와그작 씹는데 아무런 맛이 나질 않는다. 짙고 탁한 하늘. 김포공항의 정적. 깜빡이는 관제탑. 적당히 무른 공기. 2월 내 생일에 선물 받은 모바일 상품권 하나를 바꾸려고 거기까지 갔는데 (첫 번째 문제는 그 공급처가 도무지 내 동선에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겠지만) 결국은 전산망이 닫힌 10분 후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다른 날에 오라고. 40여일이 지나서야 겨우 찾아갔는데 뭐, 이렇다면 다시 정신차릴 즈음 유효기간은 훌쩍 지나있을 것이 뻔하다. 차라리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기야 주는 사람이 이게 휴지조각이 될 줄을 알고 주었겠냐마는. 보통 연봉에 저녁 시간만 제대로 지켜주면 된다고 면접 때 분명 이야기 했는데. 저녁.. 더보기 새 집과 프랑크푸르트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6새 집과 프랑크푸르트 피신해 있는 동안 다행히도 근처에 빈방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인도계 영국인 가족이 살던 집인데 이사를 가면서 세를 놓는 중이라고. 집세가 조금 높긴 했지만 급하게 들어갈 방을 찾은 것도 감지덕지였다. 빈 방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 보이는 다용도실이었고, 집주인이 직접 만든 바가 한쪽 벽에 비치되어 있었다. 파티용으로 쓰던 공간인데 집주인 아들이 꼭대기 층에 계속 살 예정이라 술병들은 그대로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생활패턴이 비슷한 한국인 플랏메이트를 구해 함께 지내기로 했다. 건축학도인 H는 말이 잘 통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네일 아트 기술로 런던 땅에서 남부럽지 않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멋진 친구였다. 술병이 가득한 찬장은.. 더보기 공포의 베드버그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5공포의 베드버그 일주일 뒤였다. 급히 찾아낸 시원찮은 행복이 처절하게 부서진 것은. 온몸이 미치도록 가렵고, 아프고, 열이 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이 100개를 웃돌았다. 허름한 호스텔에 잘못 묵으면 베드버그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는 충고의 말을 전에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지내야 할 내 방에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은 상상치 못했다. 집주인은 베드버그의 근원지를 모르니 집세를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침대 매트를 들어내고 그 주변을 이 잡듯 뒤졌다. 점만한 베드버그들이 매트를 지탱하던 나무틀 안쪽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기에 의아했지만 3번에서 5번 이상 연속적으로 물린 자국들로 보.. 더보기 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5공간의 부재는 곧 절망 매일 매일 닥쳐오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쳐낸다. 그런데, 그 뒤에 남겨진 응어리들을 마저 비워내는 작업은 으레 내 공간 안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에 주로 하던 일이다. 아, 그러나 지금 그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소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집세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을 셰어하는 형태로 집을 구했던 터라 모든 것에 룸메이트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책상 위 스탠드를 켜놓는 것 조차도. 생활 패턴이 정 반대인 동유럽계 회계 전공 학생을 만난 것도 불운 아닌 불운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지만 잔병치레가 잦아 은근히 신경을 써야 했다. 완전히 무장해제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없기에 별도의 작업 공간이 절실했지만, 학교에서.. 더보기 발목 잡는 오렌지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3발목 잡는 오렌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분명히 납입일에 맞추어 정확한 금액을 통장에 넣어 두었는데, 갑자기 학교측에서 학비 분납이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날아온 것이다. 언제까지 학비 전체를 납입하라는 통보와 함께. 첫 번째 납입액이 부족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황급히 거래 은행을 찾아 이체내역을 확인한 결과, 범인은 오렌지로 밝혀졌다. 요금제가 비교적 저렴한 프랑스계 통신회사여서 싼 맛에 계약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소리를 조금만 일찍 들었더라면……. 오렌지에서 정상적인 요금의 여덟 배를 인출해가는 바람에 학비로 나갔어야 할 금액에서 200파운드 정도 공백이 생겼던 것이다. 열 번쯤 항의 전화를 한 뒤에야 어눌한 말투의 인도계 .. 더보기 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2잿빛 겨울 위 무지개 사탕 얄궂은 이곳 한기는 가슴 속 온도계를 단번에 부러뜨리고도 시치미를 떼기 일쑤다. 영상 7도 따위에 뼈가 시린 느낌을 받는다는 건 꽤나 굴욕적이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단열이 잘 되지 않는 구조의 건물들 천지라 어느 한 곳도 마음 편히 추위를 털어낼 자리가 없는 것이다.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환영하던 나인데, 오후 4시부터 아득하게 깜깜해지는 이 스산한 겨울은 심히 당황스럽다. 이 영리한 도시는 무섭도록 어둠이 스미는 이 긴긴 겨울 터널을 무엇으로 심심치 않게 넘길 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크리스마스가 늦가을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청으로 암전되어가는 하늘 위로 금테를 두른 오색 행성들이 떠올랐고, 푸른 눈송이들은 그물이 되어 칠흑을 꽁꽁.. 더보기 런던에 속았다 인연인지 악연인지-런던의 유학생으로 #1런던에 속았다 공항에서부터 내리쬐던 찬란한 가을 볕 탓에, 런던은 본디 이리 따사로운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을은 다급히 그 조명을 거두고 겨울로 이어지는 어둑한 구름 천막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빛 꺼풀이 벗겨진 이 오랜 도시가 굳은 표정으로 그 본연의 검붉은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섬뜩함마저 느꼈지만, 내 안에 술렁이는 그 기류 위에 ‘상실감’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래선 안 된다고. 학교도, (누구나 떠올리는 런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시내도 모두 내 생각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 흩뿌려야 하는 것이다. 지하.. 더보기 '09-'10 서울. 순도 100의 무모함 서울 #5. 순도 100의 무모함 유학 무한정 연기 실은, 돌아오자 마자 바로 9월 학기로 떠날 수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교환학생 선발이 결정되기도 전에 먼저 확정된 것이 영국 킹스턴 대학 석사과정 입학 허가였다. 설명이나 듣자며 참석했던 대학 설명회에서 관계자와 인터뷰를 가지던 중 무조건부 합격을 받았던 것이다. 멜번에서 어떻게 버스킹을 시작했었는지, 그림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는지 등의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떠들어댔던 것 같다. 조건부 합격을 받아둔 다음 영어 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많은데, 내 경우엔 교환학생 때문에 미리 받은 IELTS 성적이 있어 바로 결정이 되었다. 설명회에 참석한 이유는 사실 별 볼 일 없다. 같은 수업을 들었던 영국인 교환학생이 만날 때 마다 .. 더보기 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5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 ‘역시 잘못 온 것일까?’ 브리즈번 시내의 번화가를 걸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지나가며 흘리는 수많은 대화들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빛의 속도로 빨려 들어와 뇌를 때리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은데도 너무나 소상히 들려오는 그 왁자지껄한 소리들. 긴 시간을 타 언어권 사람들과 보내고 나면 신경 써서 듣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귀가 평소보다 열려 있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갑자기 다시 모국어를 듣자면 쓸데 없는 나방 같은 정보들까지 다 채집되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또 한 달 정도는 이런 현상에 시달릴 것인데……. 어쨌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 더보기 두 번째 눈 없는 겨울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4두 번째 눈 없는 겨울 따사로운 가을 볕을 매일 같이 뽑아내던 태양이 더 이상은 재료가 없는지 뒤로 뒤로 물러만 간다. 교정 가득 수북이 내려앉은 노란 낙엽들만큼이나 열 여섯 명의 작업들도 각자의 서랍이 터져나갈 정도로 쌓였다. 학우들의 견제 아닌 견제 속에, 가능했던 모든 것들을 토해내며 살 떨리는 최종 평가를 해치운 나에게 춥고 황량한 캔버라의 7월을 선물하는 것은 자학에 가까운 행위였다. 고심 끝에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을 곳을 가기로 했다. 바로 브리즈번. 해외에 거주할 때만큼은 한국인 밀집지역을 기피하는 나이지만, 멜번과 캔버라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감에 선택한 항로였다. 한 학기 동안 종종 담소를 나누곤 했던 도예 전공 교환학생 에이미.. 더보기 Printmaking & Drawing Workshop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3브리즈번에서 비워내기Printmaking & Drawing Workshop 이 곳에서의 한 학기는, 대외적 명분상으로는 내가 이전에 배워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시간이었지만 아니, 그것보다는 내 자아를 고요 속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라졌다 돌아와 ‘간밤에 내 닭이 무슨 알을 낳았나’ 하고 지푸라기를 헤집어보는 어린 주인이 되는 어떤 놀이의 반복이었다. 전공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빡빡한 학교생활에 비하면 수업도 과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나를 쫓던 대부분의 요소들이 순간 사라진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큰 검은 작업용 책상과 큰 종이를 넣기에 넉넉.. 더보기 캔버라. 새와 밤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2캔버라, 새와 밤 1 아무것도 없다. 해야 할 일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작업과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도시. 아무 향도, 어떤 맛도 첨가되어있지 않은 정제된 수돗물과 같은 도시 캔버라. 걸어도 걸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풍경 속, 아주 멋없고, 우울하도록 솔직한 인공 호수가 있다. 여기서 만난 것은 사람도 건물도 아닌, 새들이다. 나는 이 호숫가에 앉아 정체 모를 검은 새의 일광욕을 넌지시 바라보다, 청둥오리들의 행렬에 길을 비켜주고, 동그란 열매를 부리로 아그작거리는 분홍가슴 새들이 놀라지 않도록 애써 플라타너스에서 시선을 돌린다. 짙으면서도 붉은 호주의 녹음이 황금으로 다시 피어나기까지, 노란 왕관을 쓴 새하얀 앵무새 코카.. 더보기 그렇게 돌아왔다-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1. ANU, 너희들 그렇게 돌아왔다 캔버라의 교환학생으로 ANU, 너희들 겨우내 꽁꽁 언 몸이 풀려갈 때쯤 찾아온 공간 이동의 시간. 나는 불현듯 늦여름 위에 서있다. 봄 내음도 맡지 못한 채 다시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오고 싶었고, 오게 되었으니. 드디어 찾아온 개강. 아직 열기를 머금은 햇볕 아래, 학생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더할 수 없는 활기로 교정은 들썩였다. 반갑다고, 오랜만이라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나도 교정 곳곳에 동일한 인사를 건네며 반가움을 표했다. 숲도, 이름 모를 새들 조차도 반갑고 또 반가웠기로. 이제는 방문객이 아닌, 학생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는 어깨너머로 마냥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 도서관에 당당하게 들어가도, 다리가 풀리도록 캠퍼스를 걸.. 더보기 서울 #4. 한 달을 울었다 한 달을 울었다 어느 곳을 가도, 친절한 은행 직원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사정은 알겠지만, 해외 대학으로 들어가는 학자금은 대출이 불가능해요.” 날이 갈수록 국제교류센터 조교님은 답을 재촉해 왔다. 학기가 2월 23일에 시작이라니 1월 안에는 답을 드려야 했다. 설탕이 다 떨어져 가는 솜사탕 기계 노즐에다 젓가락을 휘휘 돌려 대는 것 마냥, 나는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말에 시간표까지 적힌 수학허가서를 전달받자, 나의 온 몸엔 헬륨가스가 차 올랐다. 가느다란 정신줄만 놓으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모양새로. 귀국 직전 캔버라에 머물면서 매일 같이 보던 그 하얀 건물이 머릿속에서 만져지는 듯 했다. 크지 않아도 아늑했던, 햇살 가득한 미대 도서관.. 더보기 서울 #3. 졸업전시 졸업전시 그런 거다. 지칠 대로 지친 팽팽한 줄다리기 끝자락에야, 펄떡거리는 대어가 튀어 오른다. 전시 5일전 떨어진 지도 교수님의 지시는 청천벽력 같았다.“나온 그림들 가지고 책 하나 해.” 나는 4일간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써 내려갔다. 시놉시스는 대략 이렇다. 숨막히는 도심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화자는 태양의 권유로 길을 떠나고, 여정 끝에 닿은 호수에서 바람결에 춤추는 꽃들을 만난다. 꽃들의 춤을,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접하면서 화자는 깨닫는다. 내가 선 곳이 바로 작은 천국임을. 촉박한 시간 탓에 두 권밖에 제작하지 못했지만 졸업전시 당일, 나는 수십 점의 원화를 하나로 엮은 나의 이야기‘작은 천국의 무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속한 미술.. 더보기 이전 1 2 3 4 다음